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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티(Haiti)와 나, 700일간의 기록#1
    나라방/캐리브와 아이티 2010. 1. 19. 02:37

    아이티는 1997년부터 1999년까지 머물럿던 곳이다. 700일간의 기록이라는 것은 총 체재일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중간에 한국에 다시 들어왓던 기간, 미국에 머물럿던 기간도 포함한 것이다.

    사람의 인생은 복잡다난한 것같지만, 살면서 획기적인 경험을 하는 기간은 비교적 짧다. 어린시절에는 군대를 통해 그 경험을 하고, 나이가 들어서는 주로 사업이나 가족의 상처로인해 경우가 많다. 확실한 것은 죽음이나 극한의 상황에서 자유로운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아이티는 나에게 깊은 영향을 준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글을 써내려가지 못하는 곳이었다. 오죽하면 아이디를 haitian이라고 적었을까..그러나 이번 글은 가급적 떠오르는대로 쉽게 써볼 생각이다. 어쩌면 무료한 개인의 얘기가될 수 있지만, 개인이 겪은 느낌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997년 처음 아이티에 가다
    1997년에는 한국에 IMF가 터지기 전이었다. 당시는 인터넷이나 디지털카메라 따위가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사진이란 것은 모조리 프린트 된 아나로그 사진이 전부다. 전에는 보관 겸 인터넷에 올리려 스캐너를 이용 해 보았지만 번거롭기때문에 포기하고 간단히 아이폰으로 찍어보았다. 그러므로 사진의 퀼리티는 상당히 떨어진다.

    다시 97년으로 돌아가서, 당시 나는 3호선 수지역에서 인터넷TT선회선 사업을 하고있었다. 다이얼모뎀을 통해 PC통신에 접속해야 인터넷을 맛볼 수 있는 환경이기에, 3분에 몇십원하는 비용은 인터넷을 이용하고자하는 사람들에게 적잖은 부담이었다. 게다가 다이얼모뎀은 속도도 환상적(?)이었다. 원래TT선이라는 것은  전화선중에서 핫라인을 구축할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 즉 이쪽에서 수화기를 들면 저쪽에서 벨이울리는 단독선인 것이다.이를 리눅스의 서버에 T1선같은 대용량선을 물려, 집단 전화국이 입주 해 있는 대규모 오피스텔같은데서 핫라인을 통해 서비스하는것이었다. 이렇게하면 핫라인 유지비 3만원만 내면 24시간 무제한 사용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통신에서 고위직연구원으로 일하던 친구에게서 ADSL이라는 서비스에대해 듣게되었다. 딱 드는 느낌은, TT선 사업을 계속하다가는 바로 쪽박차게만들 아이템이었다.

    사업을 변형해서라도 지속하느냐..아니면 다른 사업을 찾느냐가 발등에 떨어진 과제가되었다. 게다가 7년여를 사귀던 이가 있었는데, 여자집안의 격렬한 반대로 심신이 지쳐버린 상황이었다. 정상적인 남녀관계에 뒷 조사와 협박..어린 맘에는 감당 해 내기 힘든 부조리였다.

    당시 목포쪽에는 작은 규모의 조선회사가 많이 있었다. 그중에서 소위말하는 떨이를 하는 소규모 조선사와 연결되어 4대의 모터보트를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다만 해외로 반출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수출을 위해 만들었던 요트였기에 내수로 돌릴 수 없는 것이었다. 원래 그것을 반출하여 사용하고자했던 나라는 도미니카공화국이었다. 어찌어찌 최종 화물기착지는 아이티(Haiti)가 되었다. 나역시, 아이티를 "고갱의 타이티"라고 착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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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공항에서..] 프랑스인 안네그레이트, 일본인 구라다씨부부가 공항에 마중나왓다. 돌이켜보니 13년전 모습이다.


    아이티는 1인당 NGO단체 비율이 가장높은 국가이다. NGO에 대해서 거의 모르던 나에게, 우리가 아는 UN NOG 1그룹
    (유네스코나 국경없는 의사회 같이 잘 알려진..)외에도 2그룹이나 3그룹의 단체들이 이토록 많고 대규모라는 것이 놀라왓다. 특히 일본은 시민운동과 NGO활동에서 독보적이다. (한국은 이에비해 개신교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아이티에서 처음 시작한 것은 배를 해변가 땅을 빌리는 것이었다. 최종적으로 낙점한 곳은 1번 국도
    (제2의 도시 캐페이션까지 이어지는 길)를 타고 시내를 벗어나서 30분거리의 지역이었다. 처음에는 바닷가로 이어지는 길이 너무 아름다워 좀 더 먼 곳을 정하려고했는데, 가이드하는 현지인이 고개를 설레설레하는 것이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지면 위험하고 심지어 길에다 돌무더기로 막아두고 서는 차량을 강탈하는 경우도 빈번하다한다. 더욱 문제는 총기가 아무런 규제없이 거래된 다는 것이었다.

    총기에대해 덧붙이자면, 군대에서 훈련으로 M16을 쏠때 들었던 총성과 한밤에 집 가까이에서 들리는 총성은 분명 깊이가 달랏다. 한밤에 울려퍼지는 살인의 굉음은 몸과 마음을 일순 얼려버린다. 세상에서 가장 듣기싫은 소리가 집주변에서 나는 총소리다.

    결국 가까운 해변가에서 배들이 정박되어있는 곳을 찾아다녀 max라는 프랑스인이 거주하는 곳을 찾았다. 이런곳에 배를 들이고 생활하는
    (배 자체가 이들에게는 완벽한 하우스였다)자들은 거의 프랑스계 캐리브 주변국가의 사람들이거나, 프랑스같은데서 도망친(?) 고기덩어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동양인들에게는 어떤 편견이나 감정도 없기에 처음 거래트기는 편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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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한강 선상카페가 드럼통을 엮어서 강위에 띄워두고 위에 나무판자를 대어서 인공부유물로 만든 것이 생각나서 사무실 겸배를 댈 수 있게드럼통을 연결하고, 나무판자를 대서 바다에 띄워두고 고정시켰다. 그리고, 이 아이디어는 아이티에 나중에 합류한 사촌형이 낸 것이다. 나는 국기를 내거는 따위를 경멸하던 작자였다. 그러나 아이티에서의 태극기는 심적인 위안 이상이었다. 최경주나 추신수가 외국에서 태극기를 단 신발이나 배트를 사용한다는 것은 국가를 대표한다는 뜻이 아니다. 개인에게 어떤, 부적과도 같은 것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자 되는게 하나도 없는 나라
    아이티에서 처음 겪은 것은 지독한 비능률이었다. 일단 한국에서 들어올 요트 컨테이너를 통관 시키는데서, 고통이 시작되었다. 정말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나라였다. 심지어는 브로커라 불리는 통관 대행인 혹은 관세사를 찾는게 일이었다. 어떤 때는 이 일에 적합한 브로커를 찾아주겠다는 브로커의 브로커를 찾아 헤메다 하루를 다 써버리기도했다. 게다가 아이티인은 크레욜이라는 아프리카언어를 사용하였고, 공식문서는 프랑스어로 되어있었다. 언어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스트레스에 더해져, 대행하는 브로커들 조차 아는 것인지 모르는것인지 그 무지의 스트레스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들이 쓰는 크레욜로" 빠꼬네~"하면 모른다였다. 그리고 해결도 없었다. 하루에 한가지 일만 되어도 좋았지만, 하루에 한가지 일을 하는게 얼마나 사치인지를 아는데 오래걸리지 않았다.

    하루종일 냄새나고 더러운 골목을 헤매다 허탕을 치고 집에와보면, 전기도 안 들어오고 수도도 안 나왓다. 전기는 내가 처음 세를 얻었던 델마지역인 경우 오전 2시나 4시에 들어왓는데, 어떤때는 4시간 어떤때는 2시간만 들어오고 한달에 몇 번인가는 아예 안들어오는 날도 많았다. 수도는 석회질이 너무 많아(※1), 음용수로 쓸 수없고 세수를 하거나 샤워를 할때만 사용한다. 전기와 수도는 관계가 많아서, 전기가 안들어오면 수도도 안들어온다. 가끔 몇달 동안 수도가 안 나올 때가 있는데, 수도관을 따라가면 중간에 파손되어 사람들이 그곳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수도관의 깊이도 2m가 안되는 것같았다. 한달이상 수도가 안나오면, 500구루드짜리 배수차를 불러야했다. 탱크에 불을 가득 담아놓고 수도가 나올때까지 사용할 수 밖에없었다. 통신 사정도 마찬가지여서, 전화가 끊어졌다 이어졌다하거나, 심지어는 다른 번호가 접속되어 몇달간 유지되기도 했다. 전선줄에 엉켜버린 통신선을 TELECO라는 전화회사 직원들도 찾아내지 못할정도였다.

    [사진: 일반사람들이 전화선을 건드는 모습]  전화선이 한번 바뀌면 6개월정도는 다른사람이 내 전화번호를 쓰고, 받고..나도 다른사람 것 사용하게되고..아주 웃기지도 않았다.

    그런 집이라도 대충 수조탱크와 전화선, 전기배터리시설이 갖추어진 집은 월 500불(※2) 이상이나 했다. 아이티에도 500불이라는 돈은 무척 큰 돈이었다. 쉽게 말해서 수도 포르토프랭스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사는 것이었고, 이렇게 사회가 불명확하고 기본이 안되어 있으니 사람간에는 쉽게 싸움이 나버렸다. 흑인들의 싸움은 눈뜨고 못 볼정도로 격렬했다.

    전기와 수도..기본적인 것들이 남아있는 수도 아이티는 그래도 양반이었다. 나중에 가본 시골의 도시는 자연과 자원이 황폐하고도, 아무것도없는 땅이 대부분이었다. 아이티는 콩과 쌀을 이용해 밥을 만들어먹는다. 그런데 그 밥을 만드는 과정에 숯을 만들어 밥을 짓기때문에 산야에는 수풀이 남아나지 않았다. 정말 국가에 나무(혹은 자연)가 없으면 얼마나 황폐해지고 인간이 고통을 받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실제 아이티의 산야는 나무가 하나도 없이 산위까지 잔디만 덥힌 듯 보여서 처음보는 사람은 요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웃하고있는 도미니카 공화국은 나무가 산야를 덥어 정글화되어있다. 나무가 있다면 생물도 자라고 인간도 그곳에서 먹을 거리를 조달할 수 있는 것이다. 나무가 없는 아이티는 아무런 자원도 없는 사막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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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산림이 사라져 풀 만 남아있는 아이티의 산] 나는 독재나 부패보다도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자연이 사라지면 인간은 죽어야한다.

    그리고 아이티는..너무 더웟다. 사방을 뒤덥고있는 더위에서 탈출할 수 없는 지경이라 이러다 미치는게 아닌가 생각들 정도였다. 누가 이렇게 비참한 국가를 만들단 말인가!! 하루에도 수없이 화가 치밀어 견딜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포르토프랭스에는 미친이들을 자주 보게되었다. 그들은 일단 정신줄이 나가면, 옷을 전부 탈의하고 싸돌아다닌다. 남녀가 따로없고, 젊거나 늙어도 다르지 않았다.

    (※1) 어느 외국인이 미국에서 사용하는 정수기를 가져와서 몇달간 수도물을 정수해서 마셨다. 나중에 오줌싸면서 너무 아파 병원에 가보니 요석이 왕창 나왓다고했다. 외국인은 보통 굴리강이라는 지하수를 사서 사먹는다. 가격은 한국과 비슷했던 것같다.
    (※2) 아이티달러: 97년당시 아이티의 계산단위는 5구르드가 1헤이션달러, 3헤이션 달러가 1 US Doller를 지칭했는데, 외국인에게는 헤이션달러가 어메리칸 달라로 통용되기도 했다.

    국가시스템이란게 한번 허물어지면 걷잡을 수없는 혼돈이 생긴다. 예를들어 한국에서 보내는 EMS는 거의 우체국에서 털린다. 공항에 화물로 붙여진 가방은 꼭 자물쇠가 부서져있고 심지어는 DHL도 분실이 일어낫다. 문제는 아이티로 화물이 직접 오는게 아니라 마이애미를 거쳐(웃긴건 미국 나라 화물검사를 싹다 한다는 점)오기때문에, 미국에서 분실이 일어나는지 아이티에서 일어나는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역시 "빠꼬네~" 다.


    (본 글은 #1로 정하고 #2에서 계속하겠습니다. 두서없이 생각나는대로 쓰는 글이다보니, 쓸 얘기는 많고 주제를 나누는 것도 어려워 나중에라도 추가하게되면 타이틀을 조금 바꿀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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