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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는 어디선가 '독자가 범인이 되는 추리소설'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사실 강객주에게 진 빚을 탕감 받을 수 있을까 하여 그의 부당한 죽음에 침묵하는 섬 주민들은 우리들 자신의 비루한 모습이다. 게다가 강객주 자신은 어떤가? "신분이 아니라 능력으로 대접받는 시대가 올 것"이라던 그도 제 딸과 머슴의 교제만은 허용할 수 없었다. "나도 딸 가진 아버지야." 이 또한 우리의 이중성 아닌가.

주민들은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다섯 번째 범인을 참혹하게 살해하려 한다. 그로써 행여 강객주의 원혼이 내린 저주를 씻을 수 있다는 듯이. "강객주여, 이 자의 피를 받으소서." 르네 지라르가 말한 '희생양 제의'. 하지만 이 잔혹한 제의에도 불구하고, 원혼은 주민들의 머리 위에 핏빛 비를 내린다. 아마도 그의 혈의 누, 처참하게 죽어가면서 흘린 피눈물이리라.

이 영화를 보면서 얼마 전 고려대에서 있었던 사건을 생각했다. 몇 년 전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고려대 진입을 막았을 때, 대부분의 학생은 이를 통쾌하게 생각했다. 그러던 학생들이 왜 이번엔 저토록 분노하는 것일까? 알량한 이권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호화 호텔을 방불케 하는 최신식 건물. 대기업의 후원과 졸업 후 진로의 상관관계. 게다가 대기업 입사율은 그 자체로 학교의 서열을 평가하는 주요한 기준 아닌가.

덕분에 대기업이라는 기업의 횡포에 흘려야 했던 노동자들의 피눈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오직 히틀러만이 실현할 수 있었던 '무노조 경영'에 명예철학박사 학위가 수여되는 것을 지켜보는 인문학 교수들의 참담한 자괴감. 전직 대통령이라는 정치권력보다 더 막강한 것으로 드러난 거대자본의 위협 앞에서 느끼는 서민들의 공포감. 안암동의 섬 주민들은 이를 너그럽게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들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학생들의 몸싸움.

"나는 왜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가?" 어느 작가는 이렇게 물었다.
몰라서 묻는가? 거대한 것은 우리에게 분노할 자유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뭔가에 가로막힌 물이 제 갈 길을 찾아 우회하듯이, 분노의 흐름도 도전을 허용하지 않는 거대한 것을 피해 사소한 곳으로 흐를 수밖에. 학생들을 탓해서 무엇하는가? 수많은 사람들의 피눈물을 맞고 처연히 서 있는 그들의 비루한 모습이 또한 우리의 모습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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