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에서 와서 농사를 짓는 분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의외로 도시에 살다가 귀농한 분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주말 농장을 제공해주신 안선생님도 10여년 넘게 교사 생활을 하시다 밥상의 채소만은 직접 지어 드시고 싶으셔서 귀농한 것이라고 한다. 요즘 자주 어울리는 한민네도 안산에서 회사를 다니다 귀농한 것이라고 한다. 안선생님이나 한민네는 산업형 농업이지만 순순히 혼자만 먹고 살기 위해 귀농하는 경우도 있다.
얼마 전 인천에서 알게된 약사 후배(아쉬람 약국)에게 연락이 왔다. 8월 7일부터 휴가고 예천에 낙향한 후배를 만나러 간다는 것이었다. 예천에 낙향한 후배(이하 빈손씨)는 전기도 없는 곳에서 월 10만원이라는 생활비로 벌써 2년째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10만원으로 한달을 생활하는 것이 가능할까 싶지만 가능하다고 한다. 더욱이 이 생활비에는 숙식비, 건강 보험, 책을 구입하는 비용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아무튼 8월 7일 후배가 왔고 술 한잔 한 뒤 다음 날 예천으로 향했다. 필자나 후배 모두 처음 가는 길이라 헤메지 않을까 싶었지만 다행히 예천이 중앙 고속도로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길을 헤메지 않고 찾아 갈 수 있었다.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 중 하나라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마을은 외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는 사람만 찾아 갈 수 있는 그런 동네였다. 차를 타고 조그만 길을 올라가자 작은 조립식 주택(씨알의 집)이 나타났다. 마지막 인가에서 700M 정도 된다고 했는데 처음에는 눈에 보이는 조립식 주택을 빈손씨가 사는 곳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작은 길에서 다시 산판길을 타고 꽤 올라가야 빈손씨가 살고 있는 텃밭이 나왔다. 이 텃밭에 작은 집(최대 수용인원 다섯명)을 짓고 살고 있었다. 처음 빈손씨 집을 방문하면서 후배와 정말 전기들어오지 않는 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휴대폰은 어떻게 충전하는지 등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전기, 수도 등 모든 문명시설은 아예 없었다.
텃밭의 작은 집
텃밭 가운데에 있는 작은 집이 빈손씨가 살고 있는 집이다. 바로 앞에 보이는 굴뚝이 인상적이다. 이런 굴뚝이 필요한 이유는 이 집의 난방은 나무를 때서하는 구들이기 때문이다. 뒷 부분의 검은색 지붕은 부엌이다.
주방
싱크대 상판으로 만든 주방이다. 수도 꼭지도 없고 호수에는 물이 졸졸 계속 떨어진다. 텃밭에서 조금 올라가면 계곡이 있는데 이 계곡에 쇠파이프를 박아 물을 끌여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에는 비가 온 뒤라 흙탕물이 내려왔다.
수도는 계곡에 파이프를 박아 물을 끌어들여 사용하고 있었고 전기 대신 초를 사용하고 있었다. 얼핏 찾아 봐도 문명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찾기 힘들었다. 특별히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자연과의 삶과 생각할 시간을 더 많이 갖기 위해 이런 생활방식을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 선뜻 내리기 힘든 결정이고 가족 역시 받아 드리기 힘들었을 텐데 의외로 빈손씨 내외는 이런 생활이 즐거운 듯 했다.
처음 인사를 하고 자리를 잡은 곳은 빈손씨가 손수 만든 정자였다. 모두 혼자서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이런 생활을 하기전에 제천의 최선생님이라는 분께 이런 삶의 방식을 먼저 익힌 듯 했다.
빈손씨가 만든 정자
빈손씨가 손수 만든 정자와 정자 내부이다. 주변에서 죽은 나무를 끌고 와서 껍질을 벗겨 만들었다. 반듯한 나무가 아니라서 혼자서 위치를 잡아 만드는 것이 쉬울 것 같지는 않았다. 정자에는 꽤 큰 책상이 놓여있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 책상인데 이 책상에는 바퀴가 달려 있기 때문에 밀면 부드럽게 밀렸다. 이 책상이 술마실 때에는 술상, 밥을 먹을 때에는 밥상으로 사용했다.
일단 정자에 자리하고 가지고 온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부슬 부슬 내리던 비는 하늘이 뚫린 듯 비를 쏟아 붓고 있었다. 산속의 정자. 그리고 그 정자에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마시는 술 맛도 일품이었다.
전기가 없는 산속에서 생활해 본 사람은 알 수 있지만 이런 곳의 밤은 정말 빨리 찾아 온다. 그리고 일단 찾아오면 순식간에 질흙보다 어두워진다. 빈손씨는 이런 생활을 이년 넘게 해서 그런지 모든 감각이 발달했다고 한다. 어두운 산길도 잘 다니고 밖의 물소리도 잘 듣는다고 한다.
빈손씨 내외
허락을 받은 것이 아니라서 어둠이 찾아올 무렵의 사진을 이용했다. 잠시 뒤 질흙처럼 어두워 졌다. 촛불을 켜고 술을 계속 마셨지만.
비가 오지 않았다면 아마 정자에서 그냥 잠을 잤겠지만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상황이라 빈손씨의 작은 집에서 모두 하루 밤을 지냈다. 혼자 살기 위해 직접 지은 집이라 방 비교적 작았다. 그러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지붕이었다. 지붕을 만들면서 누우면 아예 별을 볼 수 있도록 지붕 가운데를 유리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작은 방갈로 정도의 크기였지만 여기서 빈손씨 내외, 약사 후배, 필자 이렀게 네명이 잠을 잤다.
집 내부와 천정
집안에는 작은 창문이 하나있다. 혼자 살기위해 만든 집이라 천정도 상당히 낮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역시 밖이 훤히 보이는 천장. 맑은 날 누우면 천정에 가득찬 별을 볼 수 있다.
잠을 조금 일찍 잤기 때문에 다음 날에도 조금 일찍 일어났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 일찍 일어나니 마땅히 할일이 없었다. 좁은 방에 있는 것보다는 정자에 가 있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정자있다 보니 빈손씨 내외가 아침을 준비해 왔다. 빈손씨 집 앞의 잡초가 많은 밭이 바로 빈손씨의 먹거리를 제공하는 텃밭이었다.
봄, 여름, 가을에는 이 텃밭에서 나는 채소류로 밥을 먹고, 겨울에는 짱아찌와 김치로 밥을 먹는다고 한다. 밥에는 채식으로 인한 영향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콩과 감자가 들어 있었다.
나물, 된장, 고추창, 그리고 밭에서 방끔 따온 상치와 쌈채소 하나, 오이, 당근, 방울 토마토, 풋고추와 된장국이었다. 된장국은 손님이 와서 빈손씨의 처가 끓인 것이고 평상시에는 된장국도 없는 듯 했다.
빈손씨가 담근 인삼주로 해장을 하면서 순수하게 야채로 이루어진 아침을 먹었다. 먹으면서 든 생각은 한 두끼라면 이렇게 먹는 것이 가능해도 어떻게 매번 이렇게 먹을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의외로 빈손씨는 이미 이런 생활에 익숙한 듯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최소한의 것만 소비하려는 듯 밥도 먹을 만큼만 하고 채소도 먹을 만큼만 땃다. 불청객 두 명때문에 밥을 조금 더 많이하고 채소도 더 많이 땃지만 채소가 남는 듯 하자 버리지 않고 모두 깔끔하게 먹는 것이었다. 어차피 음식에 기름기가 없고, 밥그릇의 밥풀 하나까지 다 먹고 채소 역시 남기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가 아예 없었다. 이렇게 사는 것이라면 한달에 10만원도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수도와 전기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수도세, 전기세는 없고 오로지 건강 보험료만 낸다고 한다. 불현듯 전기도 없는데 휴대폰은 어떻게 충전하는지 궁금해 졌다.
가마솥
어떤 용도인지 모르겠지만 부엌에는 큰 가마솥이 있었다. 겨울에 불을 때면서 불만 때기가 뭐해서 올려 놓은 것인지 다른 용도가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측간
이런 화장실을 사용해본 사람들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가 어렸을 적 농가에 가장 일반적인 측간 형태이다. 통풍을 위해 바람이 잘 드는 곳에 있으며, 싸리로 감쌌기 때문에 밖에서 훤히 보인다. 측간 안쪽의 큰 돌위에 올라가 볼일을 보고 일이 끝나면 재로 변을 덮어둔다. 지저분할 것 같지만 의외로 깨끗하다.
[귀농한사람의 자녀님 댓글]
귀농한 사람의 자녀
이올린에서 이 글을 발견하자 마자 숨이 탁 하고 막혀서.. 좀 많이 답답하더군요. 인터넷에서 개인사를 밝히고 싶지 않아서 익명을 선택한 점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경북 구석에 내려가셔서... 남들하고 다른 삶을 사시는 분은 잘 구경(?) 하고 오셨는지요? 이런 비아냥을 하고 싶은 맘이 들 만큼 상처를 받았다는 점을 한번더 양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저도 정리가 잘 안되지만, 화가 올라오는 걸 참을 수 없어서 한자 적고 갑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제가 10살이 조금 넘었을 무렵에 귀농이란 걸 하셨는데. 도시에서 살다가 모든 걸 거의 잃다시피해서 급하게 시골로 이사오고 화장실 한칸도 없고, 수도시설도 없는, 다 무너져가는 흙집에 자리를 잡고 텃밭을 일궈가면서 먹거리를 해결하시게 되었습니다. 원래 시골에서 고추장에 푸성귀로 밥을 먹는게 꿈이었노라 하셨기 때문에 친구분들 모두 다들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단 남에게 얻고 텃밭에서 뜯어내니 그리고 남의 집 농사라도 거들면, 5명의 가족이 굶는 건 확실히 면할 수 있더군요. 농사도 지어보지 못한 첫 겨울이 몹시 혹독했지만, 아는 분에게 쌀을 꾸어 넘길 수 있었습니다. 채소 만으로 부족한 영양소를 감자같은 걸로 메꾼다고 하셨는데, 최저생활비 10만원도 없는 시골집에서 감자는 상당히 환상적인 부식이었죠.
일부러 선택했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든, 시골에서의 가난이라는 건 제법 살벌합니다. 비오면 집넘어갈까 이방 저방 불때면 불붙을까 바람불면 뭐 하나라도 부서지진 않을까 그렇게 불안한 가운데 그 학교같지도 않은 조그만, 학교 등록금이 모자라서 독촉을 받는 건 예사였고 푸성귀드시겠다는 아버지 때문에 친구들은 아무도 먹지 않는 보리밥을 도시락으로 싸가도 뭐 그런 건 견딜 수 있는데..
그러나, 가장 견디기 힘든건 그걸 구경하는 사람들입니다. 집이 무너져간다고 폐가인줄 알았다면서 차타고 지나가다 내리는 사람 이런 집에서 사는구나 하는 눈으로 힐끗 쳐다보고 지나가는 도시인..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도 시선은 다르지 않아서 어떻게 저런 집에서 사는가 하는 식으로 바라보는 시골 사람들. (묘하게 아이들이 악의는 없는 지 몰라도 경북 지역의 그동네 어른들은 제법 심술맞습니다. ) 가끔씩 찾아와서 간단한 찬거리라도 대접해주면 어떻게 이런걸 먹느냐는 식의 반응들.. 요즘으로 치면 농사를 지어도 일년 수입이 4-5백만원 정도 밖에 안되는 시골집에서 더 이상의 삶을 바랄 수 없는건데, 시골에서 맘편하게 이렇게 사는게 좋지? 라고 은근히 기분을 긁는 사람들. (호의와 악의는 당연히 구분이 갑니다)
그 지역 학교는 배정받은 선생도 없어서 어떤 과목은 수업도 뺴먹기 일수고, 내 꿈이 무엇이든 상관도 없고 대학진학을 하겠다는 사람은 별난 놈 취급을 해대는 선생들은 그 시골에 어렵게 사는 학생들이 많다는 걸 알면서도 어느 집에 갔더니 움막같은 집에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사람들이 누워서 밖에서 누가 불러도 나와보지 않더라면서.. 게을러서 못사는 거란 말이나 하고. (댁같이 구경오는 사람한테 질려서 안 나가는겁니다. )
또..이 맘편한 귀농생활이 대학생활까지 이어진다는 걸 아실까요? 그나마 돈 좀 있다는 시골집 아이들이야 용돈으로 몇번씩 외출이라도 즐기고 살지만, 생활비 10만원도 안드는 집 자식이 변변한 외출을 해볼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장학금 받고 특별나게 공부해서 대학이란 곳에 진학을 하면, 거기도 만만치 않은 꼴통들이 학교를 다닙니다. 햄버거 한번 먹어보지 못한 촌놈을 비웃고 뒤에서 흉보다 못해 촌스럽다고 상대도 안하는가 하면, 대놓고 그런 것도 모르냐고 면박을 하기도 하죠. 뭐 악의는 없다고 본인들은 주장을 하겠지만, 오래 살아보니 그게 사회의 문화더군요.
귀농한 사람의 자식은 이런 것들을 겪어가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도 차마 적을 수 없는 그런 일들이 마음이 몹시 아픕니다. 당신들은 쉽게 생각합니다. 가난 구제를 아무도 못해주니, 그 가난으로 인한 삶이나 상처까지 책임져주고 배려해줄 수 없는 거 아니겠냐고. 그런데, 구경하고 특별한 것을 본 듯이.. 적을 권리가 있는지 그 삶을 한번 더 돌이키게 할 권리가 있는지는 몇번이나 생각해보셨나요? 이야? 누구는 색다른 삶을 살더라.. 이 구경하는 심리 앞에 상처받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뭘 그런걸 가지고 하고 넘기고 싶겠죠?
아무 생각없이 흙집에 살던 시절에.. 소위 좀 배웠다는 아버지 친구가 찾아와서.. 우리 집 몇일치 식량으로 만든 칼국수를 얻어먹으면서 한 말이 생각납니다.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농사나 지으면서 칼국수나 먹고 살면 걱정이 없겠네.. 그렇죠.. 눈앞에서 정성스레 칼국수 마련한 저희 가족은 걱정도 없이 사는 단순한 사람을이죠?
잘 보고 구경하셨습니까? 다른 사람의 엄숙하고 성실한 삶이 뭐가 그렇게 부러운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글이나 댓글이나..저야말로 숨이 탁 막힙니다. 인간이 사는 곳을 정해 주거를 한다는 것은 그사람의 인생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귀농자녀분이 쓰신 댓글내용을 보니 느낀점이 많습니다. 저 역시 살고 싶은 지역을 찾아 많은 나라를 돌아다녔습니다. 죽을뻔한 적도 있었죠..그리고 즐거운 나라도 있었구요..
나 혼자만이라면 어떤 곳에서 살던지 어떤식으로 살던지 문제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외에 가족이 생기니 나와같은 삶은 강요만 할 수 는 없었습니다.
지금은 적당히 타협하는 선에서 일본에서 임대하우스를 운영합니다. 객지를 돌아다닌 경험이 있어 운영은 문제 없지만, 가족이 살만하다면 다시 중앙아시아쪽으로 옮겨 살고 싶습니다.
절대 가난과 불편함..그것이 주는 마약과도 같은 느낌은 잊을 수 없습니다. 같은 가난의 상황이래도 받아들이는 상황에따라서는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귀농자녀분이셨던 분에게 조심스럽게 드리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인간이 고통을 느끼고 힘들때는 가난 그자체가 아닙니다.
남을 의식하고 남에게 어떻게 비춰질까 생각하는 순간부터 자신의 인생을 사는게 아니라 피동적인 삶을 사는게 아닌지요...(그럴듯하게 사는 사람들도 실제 생활은 불만투성이로 도저히 해결되지 않은 모순도 많습니다..생각해보니 부유함을 버리고 아프가니스탄 산속으로 숨어든 빈라덴같은 사람도 있군요..)
하지만 귀농자녀분의 마지막 글에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절절히 가난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 사람의 못난 허영을 돌아보는 것같았습니다.
어떤곳에서 어떤방법으로 주거를 할것인가~! 예...그것은 어떤 인생을 살것인가를 정하는 결정과도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