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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이완! 타이완!
    Fun & Feel/세상과 나 2007. 5. 20. 02:00

    이완은 중국역사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았던 섬입니다.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것은 국민당 정부가 대륙에서 패퇴하면서, 타이완에 피신하게 된것이 시작입니다.

    중국 본토와는 인종상/정서상 달랏던 타이완은 줄곳 본토 대륙의 세력에 의해 침탈당하는 역사였습니다.

    시 2차세계 대전당시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찾은 것은 일본군의 점령이었습니다. 이때에 비로서 국가적인 체계와, 사회 인프라등을 건설 할 수 있었습니다.

    쟈..일본군의 침략이 없었다면 타이완은 낙후된 중국의 지방에 불과 했겠지요?
    한국은..아마도 이씨왕조와 안동김씨나 파평윤씨등 가문들이 득세하는 유림의 조선시대를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이유로 타이완의 감정은 한국인들의 감정과 많이 다릅니다.
    (필리핀이나 태국은 수백년동안 가벌들이 통치하는 바람에 일반 국민은 고통스러운 생활을 이어가고있죠..누구에게도 침략받아보지 못한 것도 불행입니다..결과적으로는요)

    륙에서 쫒겨난 국민당 정권이 타이완에서 예의 독재정권을 유질 할 수 있었던 강력한 무기는 당시 전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던 反공산주의 정책이었습니다. 철저하게 미국편으로 서서, 중국을 경원시하고 원주민인 타이완사람들을 억압합니다.

    국민당 정권에 변화가 생긴것은, 장씨일가의 철권통치가 끝나 타이완인 출신 李登輝(리덩후이)가 총통에 당선되고서 부터입니다. 리덩후이는 국민당에 몸담고 있었지만 대만 독립주의자였습니다. 리덩후이는 대륙출신이 아닌 대만출신으로 처음으로 국민당 당권을 장악한 사람으로서, 대만 독립 주장이 처음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리덩후이가 총통으로 집권하고 있던 지난 1990년대부터입니다.

    덩후이는 이제 미국대신에 떠오르는 중국편에 기대 정권을 유지하려는 국민당에게 다음과 같은 정치적 행보를 합니다.

    도대체 반공/친미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일순 친중국으로 아이덴티티를 바꾼다는게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입니다.


    --------- 당시 상황의 기사 스크랩입니다 --------

    롄잔은 천수이볜에게 2번이나 져



    4년 전(2000년) 총통 선거 때는 당시 야당이었던 민진당의 천수이볜 후보와 여당인 국민당의 롄잔후보, 그리고 국민당에서 갈라져나온 무소속의 쑹추위 후보 등 3명이 맞붙었다.

    당시 쑹추위 후보는 원래 국민당 출신이었고 대중적인 인기도가 높았다. 따라서 그가 국민당 총통 후보로 확정되었다면 야당 후보인 천수이볜에게 어렵지 않게 승리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런데 당시 국민당 주석이었던 리덩후이 총통은 쑹추위 국민당 비서장을 밀어내고 '전형적인 귀족 집안' 출신으로 대중적 인기가 별로 없던 롄잔 부총통을 국민당 총통 후보로 만들었다. 롄잔은 도시락도 한국돈으로 10만원 이상인 것만 먹는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국민들의 평가가 대단히 좋지 않았다.

    리덩후이는 국민당에 몸담고 있었지만 대만 독립주의자였다. 리덩후이는 대륙출신이 아닌 대만출신으로 처음으로 국민당 당권을 장악한 사람이기도 했다. 대만 독립 주장이 처음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리덩후이가 총통으로 집권하고 있던 지난 1990년대부터였다.

    따라서 리덩후이가 롄잔을 민 것은 고도의 전략이었다. 총통선거 본선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롄잔을 내보내 대만독립주의자인 천수이볜 민진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반발해 쑹추위는 1999년 7월 국민당을 뛰쳐나가 무소속으로 총통 선거에 나섰다.

    실제 선거가 시작되자 리덩후이는 천수이볜은 전혀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천수이볜의 실질적인 경쟁자인 쑹추위만 험악할 정도로 공격했다. 대만 언론들은 "리덩후이 총통이 겉으로는 롄잔을 지지하면서 뒤로는 천수이볜을 밀고 있다"고 연일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리덩후이는 롄잔 지지 유세장을 따라다니면서 "언론보도는 모두 거짓말이다. 믿지 말라"고 능청을 떨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당시 여당인 국민당표가 분산되면서 천수이볜 후보가 39.3%의 지지율로 36.8%의 친민당 후보 쑹추위와 23.1%의 지지를 얻은 롄잔 국민당 후보를 이겼다. 천 후보와 쑹 후보의 표차는 31만표에 불과했다.

    리덩후이 전 총통은 2000년 선거가 끝나자 국민당을 탈당한 뒤 '대만단결연맹'을 만들어 주석에 취임했다. 이번에 그는 아예 노골적으로 나서서 천수이볜 후보를 지지했다.




    막판까지 치열했던 선거전

    4년 전 선거의 쓰라림을 경험삼아 이번에 롄잔과 쑹추위는 단결했다. 롄잔은 총통 후보로 쑹추위는 부총통 후보로 연합한 것이다. 지난해 9월부터 지난달 말까지 롄잔과 쑹추위 진영의 우세는 확고했다. 민진당 집권 기간동안 경제 상태가 악화됐고 양안 관계의 긴장으로 인한 불안은 높았다.

    천 총통이 지난해 한 연설에서 "중국이 496기의 미사일로 대만을 겨냥하고 있다"며 군사비밀을 누설하는 등 실언도 했다. 대만을 겨냥한 미사일 숫자를 정확히 아는데 놀란 중국은 추적을 벌여 중국 안에서 활동하던 대만 간첩망을 일망타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달 28일 민진당은 '2·28 사건'일을 맞아 200여만명을 동원해 '수호 대만' 행사를 벌이면서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2·28 사건은 1947년 2월28일 당시 대륙에서 공산당에 밀려나기 일보 직전이었던 장개석 정권이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한다면서 무려 2만명을 학살한 '대만판 4·3사건'이다.

    따라서 민진당이 2월28일 벌인 '수호 대만' 행사는 대륙과의 궁극적인 통합에 우호적인 롄잔·쑹추위 진영을 겨냥한 반중(反中) 행사이자 '대만판 지역감정 자극'이기도 했다. 이 때부터 천수이볜 후보의 지지도가 일부 여론조사에서 롄잔을 앞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민당도 지난 13일 무려 320만명을 동원해 '총통 바꿔 대만 구하자(換總統, 求臺灣)'는 행사를 열어 맞불을 놓았다. 일단 숫자로 민진당을 압도했다. 여기에 지난 16일 천 총통의 부인인 우수전 여사가 거액의 주식거래를 보고하지 않아 30만 대만달러(한국돈 1000만원)의 벌금을 물게 됐다. 대만의 전 동디그룹 천유하오 회장은 그동안 천 총통에게 천 총통에게 모두 3060만 대만달러(11억원)어치 정치자금을 몰래 제공했다고 폭로했다.

    이런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다시 승기는 국민당에게 가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막판에 터진 천 총통에 대한 총격 사건은 선거의 흐름을 다시 되돌려 놓았다. 대만 선거에서는 동정표가 큰 위력을 발휘한다. 선거 집회는 대개 휠체어 탄 장애인이 등장해 "○○○ 후보를 지지한다"는 이벤트로 끝난다. 동정심을 끌기 위한 것이다. 20% 대로 추정되던 부동표는 천 총통이 총격을 입자 동정표를 던졌고, 원래 민진당 지지자들은 다시 무섭게 뭉쳤다.

    한국의 선거는 너무 과열된다는 비판이 많지만 대만은 한국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한번 대중집회에 수백만명이 몰려드는 것은 90년대 이전 한국 대선 때 여의도에 각 후보 진영이 수백만명을 동원했던 것과 비슷하다.

    한국의 지역감정이 문제이지만 대만은 대륙출신인 외성인(外省人)과 원래 대만출신인 내성인(內省人)사이의 갈등이 심하다. 여기에 젊은층은 진보적인 민진당, 40대 이상은 보수적인 국민당을 지지하는 등 세대간의 갈등까지 겹쳐있다. 더구나 이번 선거에서는 롄잔 후보 쪽이 중국과 내통하고 있다는 대만판 북풍설까지 나왔다.

    지난 2000년 총통 선거 때 천수이볜과 롄잔, 쑹추위는 한번 결전을 벌여 개인적인 감정까지 겹쳐있는 상태다. 비슷한 시기에 정권 교체를 실현했던 한국과 대만은 이후 정치판이 진행되는 상황도 비슷해보인다.


    /김태경 기자 (gauzari@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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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역정 정반대 천수이볜과 롄잔
    천수이볜과 롄잔은 지난 2000년 총통 선거에 이어 이번에도 맞붙었다. 2번이나 결전을 벌였던 두 사람은 출생배경과 자라온 환경 자체가 정반대다.

    지난 1951년 대만 남부 타이난현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천수이볜은 신동으로 불릴 만큼 머리가 좋았다. 그는 국립 대만대학 3학년 재학 중 법률고시에 최우수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는 75년 2월 중학교 동창인 의사집안 출신 우수전 여사와 결혼했다. 우 여사는 천수이볜이 정치에 본격 뛰어든 뒤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현재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다.

    천수이볜은 대만이 계엄하에 있을 때 정부의 정당 결성 금지조치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된 '야당의 대부' 황신제를 군법재판에서 자원해 변호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79년 언론자유 수호운동을 계기로 정치에 본격적으로 입문한 그는 81년 타이베이 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85년 펑라이다오(蓬萊島)라는 반체제 잡지 제작에 참여한 혐의로 8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

    그의 정치노선은 확고한 '대만독립'이며 지난 2000년 총통 선거를 앞두고 나온 그의 자서전의 책 이름이 <대만의 아들>일 정도다. 그는 95년 타이베이 시장 재직 때 고 장개석 총통의 저택 택지 일부가 시유지인 점을 들어 되돌려달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중앙 및 지방정부에 기업세를 물리는 재정권 싸움을 통해 납세자들의 권리를 일깨워주는 등 원칙론자로 유명하다.

    1998년 타이베이 시장 선거에서 국민당의 마잉지우 후보에게 패배에 재선에 실패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지난 2000년 총통 선거에 나서 승리하면서 반세기 동안 국민당이 지배해 온 대만에서 사상최초로 여야 정권교체를 이룩했다.

    이에비해 롄잔은 전형적인 귀족집안 출신이다. 천수이볜이 '대만의 아들'이라면 롄잔은 '태자당의 아들'이다. 롄잔은 1936년 산시성 시안에서 출생해 10살 때 대만으로 옮겨왔다. 그의 집안은 조부가 '대만 통사'를 집필한 사학자였으며 부친은 재정부장과 총통 고문을 지내는 등 명문가였다.

    17살 때 미국 유학을 떠난 롄잔은 정치학 박사까지 받았으며 이후 귀국해 모교인 대만대에서 정치학과장과 정치학 연구소장 등을 지냈다. 미국에 있을 때 당시 '미스 차이나' 출신이었던 현 부인 팡위를 안내한 인연으로 1965년 결혼했다. 그는 국민당에 입당한 뒤 교통부장, 외교부장 행정원장을 지냈으며 리덩후이 총통 시절 부총통을 맡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 김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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